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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P/로켓 마법의 단어 2024. 5. 25. 01:47

 

  나를 캐롤이라고 불러.¹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개인주의를 좋아한다. 그들은 개인의 감정에 대해 존중하고, 선을 넘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도 없었다. 이따금씩 누군가 이유를 묻는 질문을 하면, 만능으로 대답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가 존재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냥”이라는 단어였다. 나는 이 마법의 단어를 정말 사랑했다. 로빈과 제대로 된 통성명을 할 때도 마법의 단어는 꽤나 유용했다. 그가 애초에 질문이 많은 성격이 아님을 차치하더라도 이 단어는 내가 구구절절 설명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단어가 상상할 여지를 많이 만들어주는 단어란 걸 깨달은 이후에는 사용하는 걸 줄였지만, 나는 이따금 이 단어를 사용하곤 했다.

 

 

  말 몇 마디 제대로 나눠보지 못했지만, 진은 엉뚱한 사람이었다. -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 갑자기 도마뱀을 손에 가뒀다가 풀어주었던 때도 있었고, 침투 검사지의 질문에 필요 이상으로 세세하게 답변하던 때가 있었다. 컵의 개수를 물어보던 질문에 대답하던 모습이 그의 꼼꼼하고 엉뚱한 성격을 잘 드러냈는데, 난 그때 세상에 컵의 종류가 그렇게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컵의 개수가 또 변했어?” 진이 물었다.

  “응.” 나는 느릿하게 돌아보며 대답했다.

 

  “왜?” 진은 간단하게 되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그냥.”

 

  그때 네 답지를 보며 쓰느라 무얼 썼는지 기억이 나질 않더라. 이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전에 썼던 답안은 기억이 났다. “2개라고 썼어.”

 

 

  내가 줏대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적어도 로빈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호불호에 뭉뚱그려 대답하는 사람이었고, 적당히 현실에 묻어가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현실에 발 붙여 살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치고 매너리즘에 빠진 반응이었지만, 난 이걸 세르세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사춘기 아이같은 반응" 이라고.

 

  그 단어와 나의 공통점을 서술한다면 방황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 시절부터 나는 남들이 보는 것을 착각해서 보는 재주가 있었다. 침대 밑에 괴물이 있다며 엄마에게 매달릴 때면,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 밑 인형을 치우며 나를 달래주었고, 바깥 넓은 들판에서 가끔씩 괴물이 나와 아빠에게 말할 때면, 아빠는 걱정말라며 멧돼지 퇴치용 샷건을 들고 나가기 일쑤였다. 다행히도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내가 초등학교를 홈스쿨링으로 대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내가 제때 학교에 다녔다면 4학년이 되었던 해였을 것이다.

 

  6학년이 되어 중학교에 입학할 때 쯤, 나는 삶의 부조리함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레딧에 빠졌던 것도 그 쯤이었다. 나만의 마법의 단어를 남발하며 남들의 취향을 답습했고, 처음으로 성당도 가 보았다. 시골이여서인지 평일 오전에는 사람이 적었는데, 가끔 학교를 빠지고 그곳에 가서 조용한 공기를 느끼는 것을 즐겼다. 그것 덕분에 상담실에 불려가는 일이 많았지만, 나의 마법의 단어는 선생이 제멋대로 나를 천주교신자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비현실과 현실 양 쪽에 발을 딛고 사는 건, 언제 휩쓸릴 지 모르는 뗏목을 타고 항해하는 것과 다를 게 없어. 나는 내 삶을 종종 그렇게 비유하곤 했다. 진은 이것에 크게 동의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넘실거리는 비현실의 파도가 부조리하다는 것엔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현실에 집착하고 그곳에 두 발 붙여 살아가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또한 명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현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아가고 싶은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캐롤이라 불리어도 옳은가.

 

  “진.”

 “무슨 일이야?”

 

  “넌, 마지막 질문의 답을 뭐라고 적었어?”

 

  침투 검사지의 가장 마지막 하단을 장식한 한 문장.

  당신은 누구입니까.

 

-

1 원문 Call me Carol. 모비딕 첫 문장의 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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